이번 글은 두산그룹의 태생과 왜 맥주사업이었던 OB맥주를 포기하고, 왜 두산 그룹이 중장비사업으로 사업의 방향을 바꿨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100년이 넘는 대한민국 최장수 기업, 해방 후 한국의 맥주사업을 이끌어온 두산입니다. 하지만 창업주가 물려준 맥주사업을 버리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우리 기업을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진단해보라고 했더니 맥킨지의 진단 결과가 뭐냐하면 "이런 상태로 가면 3개월 이내에 너희 회사 부도난다 방법이 없다. 돈 되는 것은 다 팔아라. 그 중에서도 가장 돈이 되는 현금창출원이 OB맥주인데, 이것까지도 다 팔아야 한다."
-이한구 수원대학교 교수 '한국재벌사'저자
1991년 온국민을 경악하게한 최악의 사건. 일명 낙동강 페놀 방류사건. 영남지역의 식수원인 낙동강에 두산전자의 페놀이 유출된 사고였다.
두산전자가 화학제품인 페놀을 이동시키는 관이 터진 사실을 처음에는 은폐했다고 해요. 그것이 낙동강 유역에 페놀이 크게 유입되고 난 뒤에 대구 시민들에게서 "상수원에서 냄새가 심각하다."라는 이런 고발이 잇따르자 조사를 했더니, (두산전자의) 페놀 방류가 확인이 됐던 사건이에요.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이사'
페놀방류사건은 두산그룹 전체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확대되고, 두산그룹은 벼랑끝으로 몰리게 된다.
직격탄을 맞게된 것은 두산의 OB맥주였다.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수 밖에 없죠. (그래서 당시)환경부 장관과 차관이 해임되고 , 박용곤 회장도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이한구 수원대학교 교수 '한국재벌사'저자
두산그룹이 OB맥주를 버린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두산 간판사업 '맥주'를 버리다.
국내 최장수 기업의 시작. 보부상이 즐비했던 그 시절 박승직 상점이 문을 열면서 우리 나라의 기업사는 시작되었다.
유난히 장사수완이 뛰어났던 박승직의 부목점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 비결은 전국 팔도에 다양한 옷감과 무역을 통해 외국에서 들여온 면직물까지 취급하는 안목이었다.
이름난 종로의 거상이된 박승직은 상권을 일본인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지금의 동대문인 광장시장 조성에 앞장섰다.
(박승직이) 조선 상권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부각이 되죠. 그래서 고종, 철종 국장을 치를 때, 봉도대장이라고 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전국의 보부상들을 불러올려서 선두에 서서 상여를 호위하는 그런 사람이었죠.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
박승직에게는 금지옥엽아들 박두병과 알뜰한 아내 정정숙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재래식 회장분을 접하게 된 아내 정정숙은 부목점 단골들에게 화장품을 사은품으로 주게되고, 사은품은 이내 부목점의 주력 상품이 되어 박가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팔리기 시작했다.
부녀자들은 박가분을 구하기 위해 밤새 줄을서는 진풍경이 벌어질 정도였다.
(화장품을) 주요 고객들한테 사은품으로 줬어요. 그런데 써보니까 굉장히 좋아서 (화장품을) 사려는 사람이 많았죠. 그래서 상표를 박가분이라고 정하고 대량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까지가 박가분의 절정기였어요.
-이한구 수원대학교 교수 '한국재벌사'저자
해방이 되고, 조국을 되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한국산업의 큰 비중을 차지했던, 일본자본과 기술자들이 물러가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적산기업은 애물딴지가 되었다. 성급히 적산사업을 이어받았다가는 친일파로 몰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적산기업에 소속되어 일하던 조선인들은 해방 후 그야말로 끈떨어진 갓처럼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적산기업의 하나였던 쇼와기린 맥주의 조선인 직원들이 박승직을 찾아온다. 당시 쇼와기린맥주의 주식을 가지고 있던 박승직에게 사업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매일 이어지는 직원들의 눈물과 애원속에 박승직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조선인 직원들의 눈물을 외면할 수 없었던 박승직. 그러나 결정은 쉽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주주로 참여할 때부터 고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조선 사람들한테도 장사를 할 수 있도록 숨통을 열어 주자.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 주주가 20여 명이 넘는데 조선인 두 사람을 참여시킨 거에요. 대표적인 사람이 박승직 선생하고 김연수 선생 그렇게 두 분이 참여하게 되죠.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
해방직후 일본 맥주인 쇼와기린 맥주를 인수한다는 것은 박승직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쇼와기린 맥주를 인수하고 아들인 박두병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그리고 박두병은 박승직 상점의 이름을 두산상회로 바꾸면서 두산시대를 연다. 적산기업의 꼬리표를 떼기 위해 동양맥주 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하고 맥주이름도 동양맥주의 앞글자를 따서 OB로 바꾸면서 맥주사업체로 성장시킨다.
원래는 기린맥주였거든요. 기린맥주가 일본 맥주상표니까 이것도 OB로 바꾸죠. OB라는 건 잘 아시다시피 동양맥주(Oriental Brewery)의 영어식 표현을 머리글자만 따서 OB라고 부른거죠. 그런 식으로 적산기업 이미지를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이한구 수원대학교 교수 '한국재벌사'저자
일본인들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맥주는 일부 상류층만들이 즐기는 고급 술이었다. 하지만, '맥주 혀 끗보다는 목두녁'이라는 문구로 이목을 끌게된다. 한국 전쟁 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맥주는 일반인들에게 보편화되기 시작한다.
최초로 가볍고 저렴한 가격에 캔맥주를 생산한 OB맥주는 맥주의 대중화에 불을 붙인다. 본격적인 맥주시대의 개막, 박승직은 본능적으로 미래를 내다 보았던 것이다.
해방되고 나서 미군들이 들어오고, 맥주가 본격적으로 대중이 마시는 음료가 됐는데, 박승직 선생의 상업적인 안목에는 맥주가 상당히 좋은 사업이라고 생각된 거죠.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
맥주의 대중화 시대가 시작되고 강적인 OB맥주를 위협하는 크라운 맥주가 나타났다. 천적이나 다름없었던 크라운 맥주는 매번 OB맥주의 판매율을 뒤집으려 했지만 이미 맥주는 OB라는 공식이 있는 맥주시장에서 OB를 추격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때 당시 동양맥주에서 술을 보관할 수 있는 냉장고를 처음 만들어서 슈퍼마켓이나 상가에 보급하기 시작했죠. 전국적으로 하면 당시 돈으로 수백억 원의 자본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선물을 제공하면서까지 시장을 잠식하니까 결국 그 냉장고 속에는 OB맥주가 담길 수 밖에 없죠.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이사'
때마침 통기타와 맥주시대로 대변되는 70년대. OB맥주의 돌풍은 거셌다.
우리는 값이 조금 저렴한 조끼맥주를 먹었지만, 어른들은 병의 굴곡이 느껴지는 큰 병맥주를 드셨죠. 우리가 음악 감상실을 한창 드나들 때 음악 감상실 아저씨가 가끔 그런 자랑을 했던 기억이 나요. 오늘 낮에 국회의원이 와서 중화요리집에 가서 탕수육에다 OB맥주를 먹었어. 그걸 그렇게나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던 그런 기억이 나고요.
-이상벽 '방송인'
1982년 프로야구 시대가 열렸고, OB맥주의 돌풍은 야구팀 창단에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OB맥주는 그룹의 마스코트가 된다. OB베어스는 맥주처럼 톡 쏘는 시원한 경기로 다수의 팬을 확보한다.
OB베어스는 박철순같은 스타선수들을 배출하며 프로야구 출범 원년에 우승까지 거머쥐게 된다.
OB베어스의 가장 큰 이미지는 원년 우승팀이라는 것 그리고 그 당시 '슈퍼스타 박철순' 이런 이미지로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허구연 '야구 해설위원'
거칠것없던 OB맥주의 질주가 계속될 수록 경쟁사 크라운 맥주는 2인자의 설움을 뼛속 깊이 느껴야 했다.
활동성과 맥주는 굉장히 잘 접목이 되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상승효과를 굉장히 많이 냈다.'라고 생각을 하죠. 그것이 아마도 오랫동안 동양맥주가 일등을 구가한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김재영 박사 '리얼마케팅 연구소장'
그러나 OB의 맹렬한 질주를 가로막는 대 사건이 터진다. 1991년 일명 낙동강 페놀방류사건. 두산전자가 낙동강에 공업용 페놀을 방류하다 적발된 것이다. 이 사건은 두산전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두산그룹은 전체 이미지에 타격을 입고 결국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된다.
당시 구미공단 내에 두산전자라고 있었어요. 이 두산전자가 뭐 하는 기업이냐 하면 지금도 있습니다만 주로 컴퓨터라든지 텔레비전의 회로기판을 제작하는 업체에요. 그것을 제작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쓰이는 화공 약품이 페놀입니다.
-이한구 수원대학교 교수 '한국재벌사'저자
한달 간격으로 연이어 터진 페놀방류 사건. 사건을 덮기 위한 임시방편의 사과와 미숙한 뒷처리로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영남 사람들의 식수로 쓰이던 낙동강은 이 사건이후 '낙똥강'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조사과정에서 '이미 낙동강에 페놀을 흘린 것은 1990년부터였고, 페놀이 포함된 폐수를 정화하지 않고 두산전자에서 그대로 낙동강으로 흘려보냈다. 결국에는 정화비용 500만 원을 아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드러났죠.)
-이한구 수원대학교 교수 '한국재벌사'저자
두산그룹에 대한 비판은 이어졌고, 두산제품 불매운동에 이어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는 OB맥주병이 깨진채 나뒹굴었다. 직격탄을 맞은 OB맥주의 아성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두산에서 나오는 OB맥주 공장은 이천에 있었습니다. 이천공장하고 실제로 페놀사건이 있었던 낙동강하고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습니다만 결국은 물을 소재로 해서 만드는 제품이기 때문에 OB맥주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이사'
페놀사건으로 온 나라가 물에대한 불신으로 얼룩졌고, 사람들은 점차 물을 끓여 먹게 되는 것이 아닌, 사다먹는 하나의 제품으로 인식하게 된다. "소독약 냄새 나는 수돗물을 먹느니 사먹는 게 낫다" 당시 물을 사먹는 다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이야기였지만, 페놀사건 이후 생수수요는 점점 늘어났다.
우리나라 산업계에서 화학물질이 인간이 먹는 물에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줬던 점도 있고요. 페놀 사건 이후에 아이러니하게도 강물 특히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매우 높아져서 산업계에서는 생수 시장이 새롭게 전개되었습니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이사'
OB맥주의 불매운동으로 만년 2등이었던 '크라운 맥주'는 반사이익을 얻게된다.
치명타를 입은 OB를 겨냥하듯 지하 150미터 천연 암반수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다. 맥주이름도 깨끗함을 상징하는 하이트로 바꾸는데, 그 결과 하이트는 OB를 꺾고 1위로 올라선다.
하이트가 얼핏 보면 화이트(WHITE)에서 더블 유(W)만 떼어낸 것이죠. 거기에 깨끗하다는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맞물리고, 두산같은 경우는 비윤리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니까 두산 맥주 소비자들이 하이트로 다 가버린 거죠.
-이한구 수원대학교 교수 '한국재벌사'저자
저무는 OB맥주왕국을 추월한 하이트를 다시 따라잡으려 고군분투를 했지만, 이미 역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두산은 갈림길에 서게 된다. 맥주사업을 버리자는 의견과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뿌리를 어떻게 팔수 있겠냐는 팽팽한 의견 대립으로 맞선다. 급기야 경영진이었던 형제들간의 갈등은 두산그룹 전체를 뒤 흔든다.
특히 박용성 회장은 쓸모없다는 뜻의 '걸레론'을 내세우며 맥주사업 매각을 맹렬히 주장한다.
(장남인) 박용곤 회장은 소비재 산업을 두산그룹의 전통이라는 것, 우리가 가진 DNA가 있는 사업이라는 것을 주장했던것 같고요. (반면 삼남인) 박용성 회장은 과거의 소비재 산업에 대해서 특히 맥주라든가 치킨상버을 걸레론을 내세워 깍아내렸습니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이사'
때마침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경영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에서는 두산그룹의 위태위태한 맥주사업을 버리라고 권고해 왔다.
또 다시 고민하는 형제들. 100년의 전통을 이을것이냐, 현실을 직시해서 사업구조조정을 단행할 것이냐, 100년 기업 두산그룹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두산은 OB맥주를 매각. 두산에서 OB라는 브랜드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외국계 맥주기업 벨기에의 인터브루사로 넘어간 OB맥주.
사람들도 상당히 친숙한 OB 베어스가 두산 베어스로 바뀌면서 현장에 있는 저희도 한두 해 정도는 뭔가 좀 낯설었습니다.
-허구연 '야구 해설위원'
두산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맥주사업 뿐만 아니라, 식음료사업, 출판사업 등 소비재 브랜드를 매각하면서 전면 사업구조 재편에 들어간다.
두산을 잘 아시는 분들은 거의 두 자릿수에 육박하던 영업이익률이 영업적자로 전환된 상황 그리고 부채비율이 6, 7천억 대에서 1조 3천억 대까지 빨리 늘어난 상황에서 (맥주사업의 포기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요. 대다수 분들은 '두산그룹이 망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동양 'NH투자증권연구원'
그러나 두산그룹의 과감한 구조조정은 뜻박의 결과를 가져온다.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일찍이 알짜기업들을 매각해 현금유동성을 확보한 두산은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판사업인 OB맥주를 버리고 두산은 중공업 사업에 눈을 돌린다. 한국 중공업과 더불어 대우기계 등을 인수하며 중공업을 주력사업으로 선택한 것이다. 소비재 사업만으로는 그룹이 더 성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안팎에서는 이전의 사업과는 두산의 사업 추진에 출렁였다.
사실 맥주라는 큰 덩어리를 떼어놓고 생각해보면 각각의 산업 간의 연관성도 매우 떨어지고 시장 규모도 사실 그렇게 크지 않은 상태에서 규모의 경제가 되지 않고, 단기적으로 의사결정을 빨리 내려야 하는 부분에서 두산의 강점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것 같고요. 그래서 내수에서 벗어나 세계시장으로 나가서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투자를 하고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산업재 쪽으로 진출을 하자(고 결정한 것 같습니다.)
-김동양 'NH투자증권연구원'
우려 속에서 전세계 소형 건설 중장비부문 1위였던 밥캣을 인수한 두산. 한국 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 M&A 중공업사업에 힘을 싣기 위함이었다. 전세계가 주목한 두산의 밥캣 인수. 한국기업이 미국의 대기업을 인수한 최초의 사례로 주목받기도 했다.
지금 아무리 잘되는 사업도 장래가 밝지 않다고 하면, 과감하게 매각하고 새로운 사업으로 가는 그런 사례들을 흔히 볼 수 있잖아요.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어쩌면 두산이 대한민국 기업사에서 기업의 사업 구조를 180도 바꾼 대표적인 기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재영 박사 '리얼마케팅 연구소장'
사업구조를 바꾸고 체질을 개선한 두산. 하지만 2008년 미국에 금융위기가 닥치게 되고, 하필이때 전세계적으로 중공업이 불황을 겪게 된다.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개발수요가 줄게되고, 미국기업들도 유동성 위기에 처하면서 두산이 인수한 밥캣의 적자는 늘어만 갔다.
두산그룹은 다시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당시 밥캣의 인수대금을 제때에 다 갚지 못한 상황에서 두산은 서둘러 계열사의 자금을 끌어들여 밥캣 구하기에 나서게 된다.
밥캣이 사실은 해외 현지에서는 밥캣을 '막판에 간 기업이다' 이렇게 보고 있었고,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두산이 바가지 썼다'라고 이야기가 되죠. 결론적으로 그렇게 돼버렸습니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이사'
저 엄청난 장치산업을 어떤 식으로 유지해 갈 것이냐. 저것은 돈 먹는 하마인데, 잘 됐으면 좋겠지만 만약에 잘 안되면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미치게 되죠.
-이한구 수원대학교 교수 '한국재벌사'저자
최근 금융위기로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는 두산. 그룹의 주력사업을 소비재에서 산업재 구조로 바꾼 두산의 선택.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했던 백년기업 두산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대한민국 최장수 기업인 두산 그리고 전통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한 선택.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가? 두산은 오늘도 그 해답을 찾아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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