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경제/국내기업 이야기

■ 한미약품 이야기(임성기,한미사이언스,주식,주가)

Career Lee 2020. 6. 2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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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한미약품에 대한 이야기에 관련된 글입니다.


한미약품 또는 한미사이언스의 주가와 주식도 궁금해지고 있습니다.



2016년 새해부터 제약업계를 떠들석하게 한 인물이 있다. 한미약품 창업주 임성기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1100억원대의 주식 90만주를 임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증여한 통큰 보너스로 화제를 모았다.



어려울 때 허리띠를 졸라매며 연구개발 투자를 가능케 한 임직원들에게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한 결정입니다.



2010년 이후에 제약환경이 안 좋아지고 매출도 안 오르고 그렇지만 연구개발(R&D) 투자는 계속해야 하고, 그래서 임직원들에게 임금 동결도 2~3번 했습니다.


-이관순 대표 '한미약품'



신기술에 대해서 결과물이 나올 것을 임직원들도 기대가 있어서 (임직원들도) 회사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고, 임금동결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수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서동철 교수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한 세기가 넘는 역사를 지닌 한국제약업. 하지만 신약개발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좌절을 맛 보아야 했던 기업들, 성공확률 0.02% 언제 다다를지 모를 신약개발이라는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한미약품은 묵묵히 시간과 자본을 투자했다.



하지만 가장 큰 비밀병기는 바로 개발인재였다.



임성기 회장님은 새로운 신약을 만드는데 투자 전략 결정을 잘하는 분이고, 이관순 대표는 신약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향설정을 잘하는 분으로 장기간 호흡을 함께한 그런 분들이 신약 개발에 대한 신념 하나로 협력하고 보완해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서동철 교수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독자 개발기술을 가진 제약업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한 한미약품의 도전, 개량신약이라는 틈새시장 공략, 국내 첫 개량신약 성공, 거칠 것이 없었던 이들의 도전을 가로막은 것은 2010년 리베이트 쌍벌제였다.



뇌물을 준 쪽이나, 받은 쪽 전부를 처벌한다는 취지로 도입한 것이 리베이트 쌍벌제이고요. 그 당시 업계에서는 "한미약품이 리베이트를 앞장서서 주도하고 있다"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불매운동도 일부에서 벌어졌고, 그래서 상당한 타격을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해영 전 산업부장 '연합뉴스'



하지만 적자 위기에도 멈추지 않았던 개발열정과 불도저처럼 밀고나가는 선구사 기질로 임성기 회장은 글로벌 신약개발의 꿈을 이룬다.



2015년 여섯 건의 신약기술을 글로벌 제약기업에 수출하고 총 8조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한 한미약품은 성병전문약국에서 시작하여 글로벌 제약회사로 우뚝 서기까지 도전이라는 DNA로 이룬 제약거인의 신화를 만나본다.



전봇대가 골목골목 늘어서 있던 시절 서울에 많이 붙어있던 전봇대의 광고지 중 유독 눈에 띄는 광고가 있었으니, 바로 임질 매독 임성기 약국이었다. 다소 도발적이었던 광고문구는 쑥쓰러운 병으로 고민하던 젊은 남성들에게 구세주가 되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월남전에 우리나라는 32만명을 넘는 국군을 파병했는데, 당시 유행했던 성병이 임질과 매독이었다. 월남에서 돌아온 병사마다 증명서처럼 임질과 매독을 얻어올 정도였다.



아무래도 젊은 병사들이 (파병을) 가게 되니까 귀국하면서 (임질 등의) 성병에 걸린 대원들이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성병에 걸렸다고 하면 쉬쉬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사병들을 귀국 후에 육군병원에서 입원을 안 시켜줬다고 합니다. 성병을 조심해야 한다는 교육을 했는데 걸려 온 사람들이라고 해서, 치료를 안 시켜줘서 시중 약국으로 치료약을 많이 찾으러 다녔던 셈입니다.


-이해영 전 산업부장 '연합뉴스'



남들의 시선보다는 실용적인 면을 중시했던 임성기는 성병 치료제 판매로 기회를 노렸다. 포장이 되어 나오는 일반약이었던 일명 내약만을 취급했던 일반 약국과는 다르게, 직접 제조한 약을 사용해 완치율이 높았던 임성기 약국은 임질과 매독 환자들이 수소문을 해서 찾아올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1967년 중앙대 약대 출신인 27세 청년 임성기가 서울 종로5가에 개업한 임성기 약국. 개업초기에는 빈 약곽을 빌려 진열장을 채울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손님이 약을 달라며 빈 곽을 가리키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약국의 쪽방에서 숙식하면서 남들이 기피하던 성병 치료제를 조제하면서 형편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임성기 약국이 유명세를 탄 이유는 또 있다.


상호에 '임성기 성병 전문 약국'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저 집에서 약을 사면 특별히 잘 들을 것 같다"라고 무의식적인 이미지를 주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재미삼아 "임성기 약국 가봐라. 성기 약국 가봐라"하는 그런 일화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흰색 가운은 의사들의 전유물로 그 사람들만 입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는데 약사가 처음으로 흰 가운을 입고 손님들을 맞는 그런 약국으로 유명했습니다.


-이해영 전 산업부장 '연합뉴스'



당시 의사들의 전유물이었던 흰 가운을 입고, 명찰까지 단 약사가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으니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파격적인 행보였지만, 이로서 그는 환자들로부터 신뢰와 인기를 한꺼번에 입었다. 그리고 그 파격은 현재의 약사들의 차림을 선도하였다. 성병치료로 많은 돈을 번 그는 남이 만든 약으로 조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더 좋은 약을 만들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1973년 임성기는 제약회사 한미약품을 설립한다. 당시 국내 제약산업은 소위 복제약 위주의 제품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미약품도 설립초기에는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로 글로벌 제약사가 개발한 오리지널 약을 복제약으로 제조하여 판매하였다.



이미 유한양행, 종근당, 동아제약 등 거대 제약사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약사들이 모여 만들었던 회사인 만큼 수요자인 약사들이 원하는 약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그렇게 조금씩 입지를 굳혀가던 어느날 국내 제약업계를 떠들석이게 한 사건이 일어난다. 



물질특허(제도)는 1987년에 도입되었는데, 과거에는 동일 물질을 개발해도 다른 방식으로 우회해서 동일 물질을 만들어 내면 특허를 피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질특허 제도가 들어오면서 도입되며 아무리 다른 방법을 통해도 그 물질을 개발하지 못하는 제도가 도입된 것입니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과거 같은 복제약(제네릭)의 제조가 어려워지고 신약 물질을 직접 개발하려면 특허권자에게 로열티(사용료)를 지불해야하는 비용 부담이 되고, 산업 전체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경호 회장 '제약협회'



물질 특허제도의 도입. 해외 신약을 복제할 수 없게 된 국내 제약사들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국내 기술로는 신약개발에 엄두도 못내던 시절이었다.



신약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약 10~15년 정도가 걸리고, 또한 신물질을 실험실에서 약 1만개 정도를 만들면, 실제 신약은 약 3, 4개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성공률이 상당히 낮은 상황입니다. 위험률이 높은 투자를 약 10년 이상 한다는 것은 규모가 작은 영세 한국 제약회사 입장에서는 위험한 투자였습니다.


-서동철 교수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세계 유수의 제약기업과 비교하면 한국의 제약 기업은 골리앗 앞의 다윗이었다. 외국 제약사와의 정면승부는 승산없는 게임이었다. 게다가 의약분업으로 복제약 경쟁까지 심해져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부딪혀 봐야 넘을 수 있는 산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법이었다. 임성기 회장은 차선책을 내놓는다.



신약개발이 불가능하면 개량 신약으로 틈새시장을 노려보자.



화학적인 구조를 바꾸든지 혹은 제형을 바꿔서 약효는 뛰어나고 부작용은 줄일 수 있는, 여러 제형을 만든 것이 개량 신약입니다. 그래서 주사제를 먹는 경구제로 변환하거나 주세자나 먹는 약을 패치식 (파스 형태)으로 피부에 붙여서 환자들이 하여금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도 개량 신약의 일종입니다.


-서동철 교수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임성기 회장은 개량신약 개발을 위하여 매출액의 5%이상을 연구개발부문에 투자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돈 보다도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인재경영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띈 사람이 바로 이관순 연구원이었다. 카이스트 화학과 출신으로 제약관련 특허를 출원하는 등 의약기술에 두각을 드러낸 인재였다. 그를 눈여겨 본 임성기 회장은 일개 연구원에 지나지 않았던 이관순에게 손을 내민다.



제대로 된 글로벌 신약을 만들어 내는 게 내 평생의 꿈이다. 나와 함께 제약업의 꿈을 이뤄 보지 않겠나?



그 당시 제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항생제를 연구하던 연구실이었습니다. 그 전에 제가 대기업에 한 번 시험을 봤었고 그런데 그 대기업에서는 연구개발(R&D)을 하려는 기업이 아닌 무언가 새로운 사업을 하려는 (업체인 것 같아서) "저곳에서는 연구개발을 계속 할 수 없겠구나" 그래서 면접 과정에서 연구개발이 아닌 "다른 업무를 시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해서 그러면 "그만 두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대기업은 탈락 했지요. "한미약품에서 항생제 분야에 연구개발 투자를 시작한다."라고 연구실에 실장님이 추천해서 규모가 작은 회사지만 오면 상당히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관순 대표 '한미약품'



임성기 회장과 이관순 연구원의 만남, 이때부터 한미약품의 R&D 역사는 시작된다. 고작 열명 남짓의 작은 연구실이었지만 개발에 대한 열정과 투지로 이루어낸 성과는 대단했다.



2004년 국내 첫 개량신약 아모디핀 개발에 성공하여 개량신약의 시대를 연 것이다. 아모디핀은 미국 식품 의약청인 FDA의 승인을 획득하고, 발매 첫해에 100억 원여의 매출을 기록한 이후 3년만에 연매출 500억원 짜리 효자상품으로 등극한다.



아모디핀은 고혈압 시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고혈압 제품이고, 출시 이후에 바로 몇 백 억 이상의 매출 성과가 있었고, 사실은 유럽이나 아시아 시장의 허가는 쉬웠는데, 미국 시장에 허가를 받는 게 힘들었어요. 개량 신약 최초로 미국에 허가받은 의미 있는 제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종수 부사장 '한미약품'



아모디핀의 성공은 신약개발이 아니더라도 글로벌 신약 진출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아후에도 한미약품은 주사용 항생제인 세프트리악손으로 FDA승인을 획득하는 것은 물론 고혈압치료의 복합 개량 신약인 아모잘탄을 출시하여 연간 700억 원대의 매출을 기록한다.



연이은 성공으로 개량 신약개발은 급물살을 타게된다. 그러나 2009년 한미약품은 정부의 규제강화로 제약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리베이트를 준 쪽만 처벌하는 제도에서 2010년 11월부터 리베이트를 준 쪽이나 받은 쪽 양쪽을 모두 처벌하도록 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리베이트 쌍벌제입니다.


-김종수 경제부 기자 '연합뉴스TV'



그 당시 업계에서는 한미약품이 리베이트를 앞장서서 주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영업력이 뛰어나서 시장 점유율을 점점 높여가는 것에 대한 질시라는 것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해영 전 산업부장 '연합뉴스'



창립초기 복제약 판매부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영업력으로 승부했던 한미약품. 임성기 회장은 약국을 직접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서 한미약품의 약을 사용하는 약사들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고 영업사원들에게 무제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했다.



제약업계에서도 한미약품의 영업력은 유명했다.



영업력이 막강했었죠. 영업 인력을 늘리고 매달 한 번씩 1박 2일 또는 2박 3일 오프라인 교육을 받습니다. 연수원에 모여서 같이 공유도 하고 신제품에 대한 교육도 받았습니다.


-이관순 대표 '한미약품'



영업력이 강한 회사로 알려졌었는데 리베이트 쌍벌제가 도입된 후로, 더 이상은 영업력에만 의존할 수 없고...


-김종수 경제부 기자 '연합뉴스TV'



불매운동도 일부에서 벌어지고 그래서 상당한 타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해영 전 산업부장 '연합뉴스'



결국 의사들의 처방거부로 매출은 급감하였다. 2년 동안 매출만 1천 억원이 줄었고, 3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면서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임성기 회장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자금원이 되어주며 캐시카우 역할을 해주던 복제약과 개량신약 대신 순수신약개발로 눈을 돌린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신시장 개척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성공을 못한다 해도 나는 수업료로 생각하겠다.



새로운 것, 새 시도를 즐기고 기업은 남들 뒤를 쫓아서 남들이랑 똑같이 하는 것을 싫어하셨고, 무언가 우리만의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본인이 직접 실천하셨습니다.


-이관순 대표 '한미약품'



투자 시간이나 연구비와 개발비가 많이 들지만, 차별화되고 연구개발(R&D) 집약형 제품을 개발해야겠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우종수 부사장 '한미약품'



생존하기 위해서는 기술개발 만이 답이며 국제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한 임성기 회장. 그가 첫번째로 한 일은 연구원 출신의 이관순을 대표 자리에 앉히는 것이었다.



막중한 임무를 띄고 투입된 이관순 대표는 국내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신약 기술에 집중한다. 하루에 한번씩 맞아야 하는 당뇨주사를 일주일에 한번 혹은 한달에 한번만 맞을 수 있게 한 획기적인 신약. 퀸텀 프로젝트 개발에 착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뇨 치료제 중에 '인슐린'이라는 물질이 있습니다. 많이 알고 있는 당뇨 치료제인데, 다른 기술과는 차별화된 매일 투약하던 인슐린을 일주일에 한 번씩 투약하는 기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관순 대표 '한미약품'



최대 한 달에 한 번 정도 인슐린을 투여해도 환자로 하여금 복약 순응도 (약물복용 처방을 잘 따르는 정도)를 높이고, 효능은 줄지 않고 궁극적으로 환자가 치료 때문에 받는 불편함,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치료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서동철 교수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개발에 성공한다면 제약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도 남을 신약이었다. 사실 이관순이 당뇨 질환을 타깃으로 삼은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2006년 한미가 독자개발한 신기술 랩스커버리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보다 효율적인 신약개발을 노린 것이다.



'랩스커버리'기술은 환자가 약을 투여하게 되면, 신체에서 몸에 들어온 약을 빨리 배출시키려고 하는데, 그 배출시키는 속도를 느리게 하며 지속하게 해서 투여 횟수를 줄이고 복약 순응도 (약물복용 처방을 잘 따르는 정도)를 높이는 기술입니다.


-서동철 교수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1~2% 밖에 안되는 국내시장을 겨냥한 신약 개발보다는 전 세계 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하자 그래서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신약을 개발하자는 것이 한미약품의 목표였습니다.


-이관순 대표 '한미약품'



이관순은 이미 글로벌 신약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했던 랩스커버리 기술을 당뇨 치료제라는 신약에 집중한다. 적자가 계속 되는 가운데 연구개발 비용은 천억에서 천이백억 그리고 천오백억원으로 늘어갔다.



큰 제약회사 몇 군데에 우리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관심 있냐고 문을 두들겼죠. 그랬더니 놀랍게도 큰 10대 회사 중 두 개 회사가 그럼 와서 발표해보라 해서 가서 이제 발표를 했는데, 각국에서 와서 기술 평가하기 위한 발표를 1시간 정도 했는데, 굉장히 코멘트를 하는 거에요.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나을 거다 그들이 해준 지적사항 코멘트를 다 적용해서 (랩스커버리 기술이) 완성이 되어서 그 회사와 거래는 안 됐지만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관순 대표 '한미약품'



한미약품은 당뇨개발 신약에 6년동안 무려 매출의 20%를 꼬박투자했고 30여명의 전담 연구원들을 투입했다.



또한, 세계적인 당뇨권위자 10명을 영입하여 임상을 진행하고 컨설팅을 받는 과정을 반복한 결과 드디어 2015년 11월 글로벌 제약기업 사노피와 5조원 규모의 기술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다.



이게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 3, 4년 접촉을 해왔습니다. 사노피(Sanofi)는 하루에 한 번 맞는 인슐린에서 전 세계 최고 업체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노피를 상당히 염두에 두고 (기술 개발을) 했고 계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관순 대표 '한미약품'



그 당시에 우리나라 국내 기업들이 5~7%, 전체 매출의 10%를 (투자비용으로) 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한미는 20% 넘는 비용을 투입해서 연구개발(R&D)를 지속해 왔다는 점에서 한미약품 성공의 힘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경호 회장 '제약협회'



한국의 기술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매우 획기적인 일입니다. 


-서동철 교수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세계가 인정한 신약개발. 한미약품이 이루어낸 기적이었다. 임성기 회장이 뚝심있게 길을 열었고, 이관순 대표의 집념이 터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랜세월 힘겨운 여정을 함께해준 직원들에게 임회장은 마음의 빚을 갚기로 한다. 1100억대의 주식을 무상으로 증여한 것이다.



시가로 1,100억 원에 상당하는 주식을 직원들에게 나눠줬는데 모두 임성기 회장의 개인 주식에서 나눠준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당 4천만 원 쯤 돌아가는 셈인데 월급에 1,000% 보너스를 받는 셈이었고, 거기에 200% 성과급을 같이 줬기 때문에 1년 연봉을 더 받은 셈이었죠.


-이해영 전 산업부장 '연합뉴스'



결과 성과에 있는 몇몇 부서나 인원들에게만 보상되는 줄 알았는데 전 계열사 심지어 생산부 모든 직원까지 기업 경영자들한테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같고, 직원들이 그 이후로는 이건 우리 회사다. 그 금액의 내용보다는 나도 주주다 이런 개념이 확산된 것에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종수 부사장 '한미약품'



최고 경영자가 보상해주는데 주식 방식이었다 하나의 새 방식으로 의미가 있겠죠. 이 정도의 보상을 받는다면 많은 월급쟁이는 다닐만한 회사로 생각하지 않겠어요?


-김종수 경제부 기자 '연합뉴스 TV'



2015년 6건의 신약 기술을 글로벌 제약기업들에 수출하면서 총 8조원 규모의 계약체결과 제약업계에 역대 최대 매출인 1조 3천억원을 기록한 한미약품. 국내 제약업계 사상 최대의 실적이다.



신약개발의 꿈 누군가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임성기 회장은 말한다. "신약 개발은 내 생명과 똑같다." 신약개발의 꿈이 있었기에, 42년 평생을 한 곳만 보고 달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제약 강국으로의 도약. 그 첫 단추를 끼울 수 있었다. 



"돈은 부족하지만 우수한 머리와 열정 그리고 독함은 대한민국이 최고다." "2030년쯤이면 걸출한 제약사를 보유한 스위스처럼 대한민국도 아시아의 스위스가 될 수 있다."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승리한 임성기 회장. 그의 손에서 한미약품이 약국에서 글로벌 제약기업으로 성장한 것 처럼 그 언젠가는 대한민국이 글로벌 제약 강국으로 우뚝 서는 그날이 오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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