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대우그룹의 흥망사에 관련된 것에 관련됩니다.
1997년에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로 국민 경제는 위기를 맞았다.
900원대의 환율이 외환위기로 쓸려 들어가는 격랑 지대로 들어가면서, 1000원이 1100원으로 돌파되고 외환위기가 터지고 난 단계에서는 1800원에서 1900원으로 치솟아 올라갔죠.
-정규재 기자 '대우패망비사' 공동저자
대한민국이 위기에 몰려있을 때도 세계경영에 고삐를 늦추지 않은 결과, 해외 곳곳에 가장 많은 사업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재계서열 2위에 오른 대우그룹.
전 세계적으로 대우공포증이 나올 정도로 속전속결로 전 세계를 장악해나갔어요. 그래서 전 세계의 특히, 선진국 기업들은 (한국의) '재벌이라 불리는 기업들 정말 무서운 거 아냐?'라고들 했습니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그러나 1999년 여름부터 환율 급등의 직격탄을 맞은 대우는 추락하기 시작한다.
(1997년 IMF로) 위기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우 그룹은 별 탈 없이 극복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실제로 문제가 된 것은 1999년부터 (자금 압박이) 심각했어요. 1999년에 결국 (대우그룹이) 몰락했습니다.
-최공필 '전 대우경제연구소 실장'
1999년 08월 16일 드디어 대우는 백기를 들게된다. 대우그룹의 몰락. 건국 이래 최대 부도였다.
대우그룹의 회사들이 휴지조각이 되거나 '마술사가 피워 낸 장미 조각처럼 없는 거냐'하면 아니거든요. 대우그룹은 해체되었지만 그 회사들은 지금도 멀쩡히 다 살아 있잖아요. 그러면 이게 도대체 뭐냐, 누가 정말 마술을 부려서 김우중 회장을 망하게 했냐.
-정규재 기자 '대우패망비사' 공동저자
세계를 뒤흔들던 기업가 김우중 회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건재한 그 이름 대우. 대우 성공신화의 그 주인공이었던 김우중 회장.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우중 회장은 그 시절 명문고인 경기고와 연세대학교를 거쳐 무역관련 일을 하면서 수출사업에 눈을 뜨게 된다. 31살 이른나이에 협력사였던 대도실업과 자신의 이름에서 한글자씩 딴 대우라는 사명을 내걸고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다.
과거 구인회, 이병철, 정주영은 1세대 사업가라고 보고 김우중 회장은 1.5세대 창업가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연령차도 있지만 토지세력에서 산업자본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김우중 회장은 겪지 못했죠. 그리고 김우중 회장은 창업자이면서 전문경영인 스타일이었어요. 똑똑하고 많이 배웠어요.
-이윤채 작가 '시민문학사 주간'
자본금 500만원으로 시작한 대우실업은 셔츠와 내의류 원단으로 1967년 최초로 동남아 시장에 직모를 수출한다.
대우실업의 첫 원단 브랜드인 '영 타이거'. 김우중은 미개척지인 동남아에서 영 타이거 알리기에 돌입한다.
(김우중 회장이) 30대에 창업을 했다는 점에서 남들 보다 일찍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김우중이라는 사람을 보면 어려서부터 장사꾼의 기질이 참 많았어요. (나이에 비해) 일찍 사업을 펼쳤고 장사꾼의 기질을 숨길 수 없었던 본능 같은 게 있지 않았나 싶어요.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직접 샘플원단을 들고 뛰며 거래처를 섭렵. 김우중은 타이거 킴이라고 불릴정도로 동남아시장에서 원단무역상으로 이름을 알린다. 대우실업은 설립 1년만인 1968년 대통령 표창을 받을 정도로 급성장한다.
그 시절에는 섬유나 스웨터, 와이셔츠 같은 경공업 제품으로 수출을 시작할 때입니다. 이 분야의 제일 전문가가 김우중 회장입니다. 그런데 김우중 회장은 직접 해외에 가서 시장 조사를 하고 판매를 했기 때문에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배병휴 원로기자 '당시 매일경제 근무'
1970년대 경제성장을 최우선해 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의 1등 공신인 김우중을 각별히 신임했다. 게다가 김우중의 부친이 대구사범학교 당시 은사였다는 것을 알게되자 그를 더욱 아끼게 된다. 둘은 사업 이야기 뿐만 아니라 고민과 개인사정을 나누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김우중 회장이 67년도에 대우실업을 만들고, 69년도에 수출을 많이 해서 산업훈장을 타요. 그때 (서로) 처음 본 거에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김우중 회장이) 김용하 선생의 아들인 거에요. 박 대통령이 "네가 김용하 선생님의 아들이냐?" (하고 물어봤더니) (김우중 회장이) "네, 그렇습니다."라고 하니 박 대통령이 대견해했어요. 그런데 해마다 '수출의 탑'을 타고 72년도에는 우리나라의 랭킹 2위의 수출업체가 되어버리니깐 박 대통령으로서는 안 예뻐할 수가 없죠.
-이채윤 작가 '시민문학사 주간'
농업이 주 생계수단이었던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농가 소득증대를 위해서 늘 고심했다. 특히 농한기에 소득이 없는 농가가 큰 걱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의논 끝에, 김우중은 탁월한 아이디어를 내놓게 된다. 봉제공장을 지은뒤, 농민들에게 간단한 기계를 나눠주어 스웨터 짜는 일감을 주자는 것이었다.
스웨터 주문을 가져다주고 뜨개질 감을 나눠주니 아줌마들이 호기심으로 몰려들었어요. 급료를 주는데 농사짓는 것보다 더 나은 급료를 줬어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10개 정도를 만들어요. 그런데 급료를 현금으로 주니까 아줌마들이 (스웨터를) 20~30개씩을 만들어서 오는 거에요.
-이채윤 작가 '시민문학사 주간'
때마침 미국에서 봉제제품 주문이 밀려들어 공장은 수출에 큰 공을 세웠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 공장을 '새마을공장 1호'로 지정했다.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이 본격화 된 시점이었고, 이를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은 다시 한번 김우중 회장의 능력을 인정하게 된다.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던 시절 교통부에서 짓던 회관에 큰 화재가 발생한다. 서울역 한복판에 흉물스러운 건물이 보기 싫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김우중을 불러 공사를 맡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울역 앞 광경이) 너무 보기 싫다. 특히 서울역과 김포 공항을 많이 신경 쓰던 분이셨어요. 그걸 정리를 좀 하자고 했죠 거기가 국유지였어요. 땅을 정리를 하는데 토지가 너무 광활해서 잘 안되었죠. 그래서 골치가 아프니 해결사 김우중을 부른 거죠.
-이채윤 작가 '시민문학사 주간'
대공사를 제안받은 김우중은 믿고 맡길만한 건설사가 마땅치 않자 직접 건설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즉시 부지를 매입하고 대우센터 공사에 착수한다. 대우센터를 완공하기만 한다면 그 실적만 가지고도 건설업계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말 대우 사람들은 어떻게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일반인들이 궁금해 했어요. 기업 공개는 했지만 일반 국민에게 보이는 것은 없었을 때니깐 건물을 지으면서 김우중 회장과 저는 '이 건물이 결국은 대우가 어떻게 일을 한다는 것을 한국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어요.)
-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12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대우건설. 약 4년 동안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성된 대우센터는 1970년대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의 상징물로 손꼽히게 된다.
그 당시만 해도 건물을 (공사 시에) 먼지가 나서 (건물 주위를) 포장을 하고 지었어요. 건물이 거의 완성이 되고 포장을 벗겼는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건물이 예쁘다'라는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대우 직원들도 '이것이 우리의 본가다'라는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어요.
-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4만 여평의 건물 안을 대우가족으로 꽉 채우는 게 목표였던 김우중 회장. 건설신화로 5년만에 그 꿈을 이룬 대우는 국내 건설업계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대기업이 되었다.
대우센터를 짓자마자 바로 롯데호텔, 교보생명을 짓고 힐튼호텔을 지어서 시작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그리고 1973년에 해외 건설을 시작해서 상당한 붐을 일으켰습니다.
-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해외시장 개척에도 눈을 돌린 대우. 그 무렵에는 수많은 경쟁사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던 시기였고, 대우는 해외건설사업의 후발주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사회적 인프라가 부족한 미 개척지인 리비아를 공략하기로 한다.
수익성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바로 선점 효과에서 나옵니다. 그런 면에서 중동과 아프리카는 어떻게 보면 미개척지죠. 미개척지를 먼저 선점한다는 것은 엄청난 수익을 보장해줘요. 김우중 같은 뛰어난 장사꾼의 눈에는 미지의 세계는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첫번째 맡은 공사는 리비아의 벵가지 지역의 의과대학 신축공사. 예상보다 미개척지에서의 건설은 쉽지 않았다. 50도를 넘나드는 폭염과 물 한방울 나지 않는 사막. 야영생활을 하면서 모래폭풍과 끝없이 싸워야 했다. 여기에 기능공들의 파업까지 겹치면서 불리한 조건들이 더해졌다. 그러나 대우건설은 열악한 조건에서도 공사기간을 석달이나 앞당겨 리비아에 대학건물을 지어올린다.
건설현장에서는 물이 없으면 공사를 못 합니다. 그런데 그 근처는 80년 동안 물이 한 방울도 안 나는 지역이었어요. 운이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스웨덴 업자들하고 협력을 해서 근처에 엄청난 양의 물을 발견한 것이죠. 그래서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납기 내에 대학 건물을 건설했습니다.
-이경훈 '전 대우그룹 회장'
밤낮없이 일하는 대우의 건설현장을 지켜보던 당시 국가원수 카다피는 대우의 저력을 시험하기 위해 비행장을 하나 더 건설해 달라고 제안한다. 그 공사는 이미 세계적인 건설사들이 실패한 난공사였다.
우리가 밤낮으로 일하는 것을 보고 카다피 원수가 '이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래서 공사장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 캠프에 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리비아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일을 해줬으면 좋겠다." 그런 말로 격려를 해주고 가셨어요.
-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김우중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흔쾌히 공사를 수락한 김우중과 대우건설은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공사를 강행했고, 이에 크게 감동받은 카다피는 대우의 힘에 놀라고 대우인에게 감격했다.
공사직후 1년만인 1980년 대학건물에 이어 비행장 완공을 성공시킨 대우건설은 그때부터 김우중과 카다피는 수시로 대면할 정도로 돈독한 사이가 된다. 그 뒤 대우건설은 리비아의 크고 작은 건설들을 맡아 최대공사 수주를 기록하게 된다.
대우건설에 대한 신임은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카다피는 대우건설을 오작교로 한국과의 국교수립을 제안하게 된다.
그때가 대우건설 이란 고속도로를 닦을 때에요. 굉장히 큰 규모의 공사였는데, 대우가 보증을 서서 이란 정부가 빚을 내고 그 돈으로 대금을 받기로 하고 고속도로를 닦은 걸로 기억하는데요. 김우중 회장이 담보를 해서 돈을 빌리게 해서 그 공사를 해주고 그 돈을 받아오는 거죠. 그런 식이에요.
이문열 '당시 김우중 회장과 해외출장 동행'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사라고 한 김우중. 김우중의 개척정신 속에는 늘 시간을 금같이 여기는 부지런함이 뒷받침 되어 있다. 항간에 떠돌던 일 중독자라는 말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저도 성격이 급해서 식사를 빨리하는 편인데, 저보다 더 빨리하는 사람들이 대우 사장단(입니다.) (해외 출장 중) 같이 식사를 할 때 제가 반쯤 먹었을 때, 김우중 회장이 먼저 숟가락을 놓고 나머지 5명이 일제히 놓습니다. 나는 밥을 덜먹었는데 (숟가락을) 놓을 수도 있고, 혼자 앉아서 먹고 있자니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문열 '당시 김우중 회장과 해외출장 동행'
무역과 건설분야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대우는 새로운 사업에 눈을 돌리게 되는데, 바로 자동차사업이었다. 당시 미국 GM사와 자동차 조립생산을 해오던 대우는 GM의 지분을 전량인수하여 대우자동차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GM 하고 (대우의) 합작 기간 동안에 초기에는 의사결정을 GM이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GM과 글로벌 경영전략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수출과 독자개발 그리고 투자도 해야 되는데, GM의 전략이 우리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래서 자꾸 경영이 어려워지니깐 '우리 나름대로 독자경영을 해야 되겠다.' (생각을 했죠.)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회장'
신형 로얄 살롱과 로얄 프린스 등 로얄 시리즈를 내놓으며 국내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국민차 티코의 생산으로 해외진출에 박차를 가한다. 또한 중소형 모델 위주의 자동차 생산으로 동구권, 남미, 아프리카 등에 진출한다. 이후 해외에서 대우차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해외 공장을 불과 3~4년 만에 열몇 개나 만들었고 전 세계에 (대우자동차) 판매점을 200~400개 만든 것도 3~4년 만에 한 겁니다. 그렇게 안하면 경쟁이 안 되죠.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회장'
그러나 예고없이 닥친 위기.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위기가 한국에까지 이어져 환율이 폭등했고 기업들을 위협했다. 환율쇼크로 국가경제가 위협받는 지경까지 오게된다. 물론 대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국적 기업의 세계 경영이라는 것은 자기 본국에서 모든 자본과 기술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에 여러 개의 법인을 두고 거기서 신용과 금융을 일으켜서 끌고 가는 겁니다. 그 방법을 한 것이 바로 대우의 세계 경영입니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가 오니까 그 흐름 자체의 맥이 끊어져서 거대한 부실 그룹으로 평가된 것 아니겠습니까.
-배병휴 원로 기자 '당시 매일경제 근무'
때마침 일본 증권사에서 발표한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를 통해 전세계에 대우의 위기가 생중계 된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천하의 김우중도 손쓸수 없는 최악의 상황 이대로라면 대우의 몰락을 그대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애널리스트 리포트 같은 경우에는 긴가민가하는 시장의 의심을 굳히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보고서가 나간 이후로 상황이 급격하게 나빠졌죠. 'Herd behavior(군집행동)'이라고 하는 쏠림 현상이 심각한데, 우리같이 시장 규모가 작은 곳에서는 애널리스트가 진단하게 되면 쏠림 현상이 급격하게 나타나죠.
-최공필 '전 대우경제연구소 실장'
조속한 상황타개를 위해 정부는 삼성과 대우에 빅딜을 제안한다. 대우차가 삼성차를 인수하고 삼성이 대우전자를 인수하는 조건의 협상이었다. 삼성그룹도 애물딴지인 삼성자동차로 그룹전체에 위기가 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대우전자를 삼성에서 가져가고, 삼성자동차를 대우에서 가져가는 (빅딜 협상이 있었습니다.) 그룹에서 주력하는 업종을 중심으로 재편하는 큰 그림이 제시가 되었고요. 그 배경은 아무래도 자금 사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우와 부실이 컸던 삼성자동차였습니다. 삼성의 합리화와 (대우의 필요성이) 맞물려서 제시된 계획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공필 '전 대우경제연구소 실장'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빅딜은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두 그룹간의 기싸움에 시간은 흘러만 갔고, 그 사이 부채는 늘어만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조차 손쓸수 없는 상황으로 변해만 갔다. 그러나 김우중은 자신을 믿었다. 국가의 골치덩이였던 적자사업을 흑자사업으로 바꿨고, 기업을 살린 경험이 이번에도 대우를 살릴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대우는) 환율이나 여러 가지 해외유동성을 조달하는데 중요한 거시 요건에 대해서 의심을 안 습니다. 안정적인 여건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고, 불안했을 때는 정부의 개입을 통해서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상황이 급변할 수 있다는 것과 관련된 위험을 관리하는 노력에 대해서는 사실상 대비가 덜 된 상황이었습니다.
-최공필 '전 대우경제연구소 실장'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대우. 그러나 그 희망은 절망으로 바꿔버리는 사건이 찾아온다.
대우전자의 모 임원이 부실 관련 자료를 들고 삼성에 투항을 했습니다. 찾아가서 "대우전자는 이런 부실이 많다"라며 부실 내역을 깨끗하게 적어서 삼성에 준 겁니다. 말하자면 대우전자에 배신자가 생긴 겁니다.
-정규재 기자 '대우패망비사' 공동저자
예상치 못한 일로 마지막 기대였던 빅딜카드가 버려질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대우의 입지는 크게 흔들리게 시작해 천정부지로 치솓는 환율에 더이상 대우에 자금을 수혈해 줄 창구는 전무했다. 드디어 정점을 찍은 빅딜 무산 결정. 대우의 몰락이 현실이되는 시점이었다.
(대우가) 빅딜에 너무 많이 의존했어요. 대우에서는 빅딜의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고, 유동성 극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만 지체되고 빅딜도 안되니 오히려 타격이 더 컸었죠. 그래서 (대우를) 도와주려고 한 것 같은데 실제로는 대우의 몰락을 앞당긴 그런 카드였죠.
-최공필 '전 대우경제연구소 실장'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라는 책을 통해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김우중 회장. 샐러리맨의 신화였던 그의 백기투항. 서울의 중심부를 호령하던 대우그룹. 공격적인 해외시장 진출로 국가산업에 한 획을 그은 세계 경영의 1인자 김우중. 세계를 누비던 그는 빛나던 대우의 몰락을 그 누가 예견이나 했겠는가.
김우중 회장의 정신, 김우중 회장이 키웠던 기업들이 지금도 다 멀쩡히 살아 있는 거에요. 그렇게 본다면 그때 대한민국 정부가 김우중 회장과 더불어 무릎을 맞대고 '대우그룹의 자금난을 타개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는 그런 아쉬움은 남는 것입니다.
-정규재 기자 '대우패망비사 공동저자'
가장 먼저 남보다 빨리 세계 경영에 앞장섰던 김우중 하지만 건국 이래 최대의 부도를 맞은 이 또한 김우중이었다. 수많은 대우의 기록사 한켠에 남은 김우중 그리고 그의 도전을 훗날 역사는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경영경제 > 국내기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미약품 이야기(임성기,한미사이언스,주식,주가) (0) | 2020.06.22 |
---|---|
■ 두산그룹 이야기(맥주사업,두산베어스,두산밥캣,두산중공업 등) (1) | 2020.06.21 |
■ 위기의 한국의 보험사들, 그 원인은? (0) | 2020.06.16 |
■ 두산중공업의 주가가 개박살 난 이유 (0) | 2020.06.14 |